9 – 색의 원천

9 – 색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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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름-행성의-꿈-9-색의-원천
검은 구름 행성의 꿈-9-색의 원천: A3 크기, 120g 종이


2143년 8월 16일

<색의 원천>

그녀는 글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느끼기 위해 제목을 붙인다 했다. 나도 그녀처럼 내 글에 처음으로 제목을 붙여 보니, 그럴싸하다.
이 글은 내 것이다. 그러나 제목을 붙이는 행위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녀에게서 왔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죽은 그녀의 것이다.

날짜를 쓰는 방식도 그녀에게서 왔다. 그러므로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그녀는, 오히려 그때 그 순간보다도 더 찬란하게 내 기억 속에서 빛난다.
찬란함.
기억.
빛.

마음이 무겁다.

오늘 내가 밖에 나갔을 때 확인한 것:
달이 색을 바꾼 것. 이제 달은 파랗다.
그리고 그녀는 썩어 문드러졌다.

공기식물은 어느새 다시 검어져 있었다.
나는 그 근처를 떠나기 전, 잠시 기다려 보았다.
나를 먹기를.
그렇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잡아먹히지 않는다. 빛나지 않아서.

내가 다시 희게 웃을 일은 없을 것이다. 희게 생각하고 느낄 일도 없을 것이다. 내게 미래를 줄 수 있는 인간을 발견했다는 순수한 기쁨으로 하얗게 타오르지 않고서야, 나 같은 자가 다른 희열을 느껴봤자 얼마나 느끼겠는가? 깨달음을 얻어서? 보람을 느껴서? 하다못해, 돈을 많이 벌어서?

게다가 어떤 종류의 희열은 검지 않은가? 복수 같은 것.

내가 아무리 굴 밖을 활보해도, 심지어 공기식물을 낚아채 새로 말랭이를 해 먹어도 똑같을 거다. 나는 안전하다. 지독하게 안전하다.

나는 확신한다. 인간이 적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제 확실해졌다.

당신이 이 메모를 발견한다면, 아무 희망도 키우지 마라. 그래도 키워야겠다면, 적어도 희망이란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는 알라.

그 차이였다. 어머니 아버지와 살 때는 우리가 빛나지 않았던 이유. 어머니 아버지는 내게 희망을 주려 하셨지만, 그리고 나도 희망을 가지려 했지만, 우리는 소멸해가고 있다는 우리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래라고는 없었다. 그저 과거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과거를 담음과 미래로 나아감은 그렇게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 행성에서.

그래도 내가 잘한 일이 있다면, 그날 휴대폰뿐만 아니라 잠자리채도 챙겨갔던 것. 덕분에 그녀의 스케치북도, 내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를 먹은 그 공기식물에 그녀의 빨간 삔과 내게 보내려던 편지가 남아 있길래 가져왔다.
읽어보았다. 거기서도 제목과 날짜를 보았다.
눈물이 났다.

적들은 공기식물을 키운다. 적들은 우리도 키운다.
나처럼 방목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게 하늘거리던 드레스를 바탕으로 추측건대, 반대의 경우였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붙잡은 그 손을 알았던 것 같다. 그 손 역시 그 여자를 알았다. 손은 그녀를 움켜쥐고, 공기식물에게 먹였다.

그전까지 그 손은 딱 꿈꿀 수 있을 만큼만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리고 글을 읽혔다. 아, 글. 읽힘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쓰임이었을 것이리라.
웃기지 않은가. 글은 읽을 수도, 읽힐 수도 있다. ‘읽다’란 그런 단어다. 할 수도, 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쓰다’는?

글을 쓰다. 글을 쓰이다. 왜 어색하게 들리는가.
쓴다는 행동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그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먹혔다. 가장 밝게 빛날 때.

공기식물은 검다.
적들의 비늘 덮인 손은 검다.
그놈들의 손은 우리 눈에 보일 때도 있으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 행성의 모든 것은 달과 우리를 빼고는 무채색이다.

죽기 직전,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빛이 났다. 비유가 아니었다.
그러자 공기식물은 마냥 정처 없지 않았다.
그것은 검게 태어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몸을 집어삼키고 목을 관통해 뿌리를 내리고는 그 웃고 있는 얼굴이며 팔다리에서 피를 쫙 빼냈다. 그러고는 지구에 사는 그 어떤 열대 식물보다도 더 찬란한 오색 꽃을 피웠다. 빨강, 초록, 파랑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스펙트럼의 색으로 빛났다.

그러나 오늘 이미 도로 검어졌으니, 조만간 녀석은 새로운 먹잇감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난 놈들을 굶기겠다.

미래에 대한 희망. 그건 내게는 이제 없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죽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따라서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이 행성의 돌처럼 모래화되어 흩어질 게 당연한 이 증거, 우리가 존재했던 증거를 내가 삶으로써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죽는 그 날까지, 우리가 존재했던 이 흔적들을 보호하며 살겠다. 혹시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의 손아귀에 있고, 우연히나마 우리처럼 잠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면, 이 모든 것을 발견할 확률이 조금이나마 높아지도록.

분명히 말해두겠다. 우리는 그들이 잠깐이나마 그들 행성에서 누리는 색의 원천이다.
저들이 삼킬 빛을 주지 말라.
꼭 꿈을 꿔야겠다면, 화석을 꿈꿔라.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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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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