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사건

8 –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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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름-행성의-꿈-8-사건_앞
검은 구름 행성의 꿈-8-사건_앞: A3 크기, 120g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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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푸른색으로 바뀐 날 문자로 기록한 녹취록.

(속삭이듯) 밖입니다. 밖에 나왔습니다. 굴을 떠나, 약속 장소가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구름은 검고, 오늘은 은색 진눈깨비가 가볍게 내립니다. ‘내린다’ 함은 그저 지구에서 쓰던 구어적 표현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내리지’ 않습니다. 중력이 너무 약해서 검은 구름은 부유하는 저를 휘감기 일쑤고, 그 구름이 뱉어낸 진눈깨비는 지표면으로 향하다가도 다시 마음을 바꾸듯, 바람결에 위로 회오리치곤 합니다.

공기는 언제나 미지근. 언제나 달이 떠 있습니다. 오늘은 초록색 달입니다.

해라고 하지 않고 달이라 하는 이유는, 밝기가 그리 세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색을 바꾸곤 합니다. 빨강. 초록. 파랑. 일반적으로 태양은 왠지 하나여야 할 것 같기에, 우리는 지구에서 그런 상황에 익숙한 인간들이었기에, 우리는 저걸 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이 행성에 태양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그건 모릅니다.

아, 그리고 공기식물. 여기에는 제가 공기식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구름이나 비, 진눈깨비, 눈 같은 기상 현상 요소들 외에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일한 것들인데, 저희는 이것들을 허공에서 낚아채 먹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식량입니다.

이 녀석들은 검디검은데, 처음엔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는 식물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배가 고팠던 나머지, 낚아챈 한 녀석을 굴에서 잘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혹시 그 결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 얼른 하룻밤을 자고 나니, 여전히 숨은 붙어 있었다더군요.

또한 혹시 공기식물을 부모님만 드시고 저를 남긴 채로 돌아가시면 안 되니까 제게도 공기식물 조각을 먹였었는데, 어린 저조차 아무런 부작용 없이 살아남았죠.

그때 이후로는 공기식물을 사냥합니다. 사냥이라고 해봤자 잠자리채로 낚아채는 것이지만…… 얘네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든요, 공기식물은. 하지만 잘 떠다니기 때문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제법 사냥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기식물인 것이죠. 아무튼, 다른 먹을 것은 이 행성에 없습니다. 일단 공기식물을 다른 무언가가 사냥하는 모습도, 공기식물이 뭘 잡아먹는 모습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식물이 뭘 잡아먹기도 하는 건지…… 그것도 과학적으로 잘 모르겠네요. 파리를 잡아먹는 식물이 있었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아무튼 이 검은 구름 행성에 있는 것들 중 가장 무해한 건 아마 이 공기식물들이 아닐까—
아! 저기! 설마…… 아니 진짜……

[울먹거림.]

여러분. 아아…… 저기, 빨간 삔을 한 여자가……
아아, 제가 오늘을 고른 건 혹시나 위험해질까 봐, 아직 직접 마주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아마 6월 16일 이후로 매일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나 봅니다. 저기, 저 사람 옆 공기식물의 줄기 하나에 편지가 매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직접 만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저한테 전하려던 편지……
정말 인간 여자가……
앗! 손을 흔듭니다. 손을, 흔, 흔, 흔, 흔들어요. 저를 봤어요!
저도, 저도……

(크게) 여기! 여기 있어요!

(다시 작게) 사람입니다. 진짜 사람입니다. 저는, 저, 저, 저는, 어머니 아버지 말고는 수십 년을 한 번도 사람을, 저 아닌 다른 사람을……
머리가 단발이고, 빨간 삔을 했고,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몸 주변으로 두둥실 떠 있는 여자분이 저기에……
저 공기식물이 저희가 만나기로 하던 장소거든요. 공기식물이 늘 움직여 다니니까, 약속 장소가 정확하면서도 부정확했습니다. 정확히 저 구겨진 잎을 가진 식물이긴 하지만, 그 식물이 어디에 있을지는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이 행성은 공기식물 말고는 돌이나 구덩이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으니까……

(좀 크게) 여기요! 네! 네!!

[훌쩍인다.]

(다시 작게) 웃네요. 저 사람이 웃고 있어요. 저도 웃고, 울고, 웃고…… 하하하. 우리한테서 빛이 난다는 건 착각이겠죠? 그런데 정말, 밝다는 게…… 밝다는 건 이런 거군요.
아니…… 근데……
정말 빛이네요?
여러분, 진짜 빛입니다!
저런 걸 본 적이 없어요. 저런 걸—

저도. 저도 빛나요. 저…… 저는 이런 걸 본 적이 없네요! 정말로 사람이 이렇게 빛날 수가 있구나! 아…… 우리가 인간 둘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 아닌데. 어머니 아버지와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아니면 제 눈이 이상한 건지……

손에 뭘 들고 흔듭니다. 스케치북 같은 건가? 크고 넓적한 물체! 아! 어렸을 때 저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저한테 받은 편지도!
표정도, 기분도, 정신도, 깨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
아.

[훌쩍인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면 안 되는데. 첫인상을 남길 일도 없으리라고 믿는 저한테, 부모님은 언제나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가까이에서 그 첫인상을 남길 기회—

[끼이이이이이이익!]

아아악!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충돌음. 익룡과 같은 끼이익 소리는 계속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

헉. 헉. 헉. 헉. 헉……
……
..
.
..
……

검은-구름-행성의-꿈-8-사건_뒤
검은 구름 행성의 꿈-8-사건_뒤: A3 크기, 120g 종이

(아주 작게) 바람에 날려 돌에 충돌해 나가떨어졌는데, 운 좋게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다시 기어나가기만 하면……!

[펄럭이는 소리.]

안 돼!

종이. 여러분. 종이. 저 사람이 들고 있던…… 스케치북이 맞아요. 스케치북. 제가 그걸 지금 잠자리채로 겨우 낚아챘어요. 그리고—

[더 작게 펄럭이는 소리.]

편지. 제가 쓴 편지. 지금 바람이 부는데, 여기 이 구덩이가 바람이 모이는 곳인가 봐요. 이리 날아와서 잡았…… 아 근데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

[기어나가는 소리.]

헉……

……
..
.
..
……

손입니다, 여러분. 검은 비늘이 덮인 손. 놈들 중 하나입니다. 이놈들은 오늘처럼 유난히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서, 마치 중력이 강해지기라도 한 느낌이 드는 날이면 갑자기 허공에서 저렇게 나타나 눈에 보이게 되고, 다음 순간이면 또 사라집니다. 그러면 아주 농락당하는 기분이 되는데, 저 쓰레기 새끼들이 저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야! 야! 그만둬! 야!

제가 최대한 빨리 헤엄쳐 가보겠습니다.

[공기를 빠르게 가르는 소리.]

이 새끼야! 떨어져! 그 여자를 놔둬!

[흐느낀다.]

빛이…… 저렇게 빛이 나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싫다고 이래? 그래서 그러는 거야? 너네가 빛나지 못해서 우리까지 끌어내려서 밟아 죽이려고? 우리가 너네한테 뭘 어쨌다고! 그냥 좀 살겠다는데! 살겠다는—

[숨이 턱 막힌다.]

안 돼. 손이. 손이 여자를 잡는데……
저 여자는 왜 도망치지 않지? 왜…… 얼어붙은 건가?

아니 잠깐. 잠깐!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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