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사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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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름-행성의-꿈-7-사건-이전
검은 구름 행성의 꿈-7 – 사건 이전: A3 크기, 120g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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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2시간 전 상태를 녹음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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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푸른색으로 바뀐 날 문자로 기록한 녹취록.

아.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인류. 인류라고 합니다. 성이 ‘인’이고 이름이 ‘류’인 것은 맞지만, ‘인’은 아버지의 성도 아니고, 어머니의 성도 아닙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변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 날,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름을 바꾸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이 같았습니다. 저는 인류이고, 어머니는 인연, 아버지는 인정으로 이름을 바꾸셨지요. 우리끼리 살 수 있다는 자기 암시였습니다.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서부터 내려왔으나 이제는 다 의미 없는 성 같은 거, 그것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다른 성 같은 거는 이제 이 테라 인코그니타,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행성에서는 의미가 없다며……

아. 역시 손글씨보다는 말을 하면 이렇게 얘기가 길어지는군요.
저는 오늘 제가 오래도록 살던 굴에서 나옵니다. 물론 그전에도 정찰을 위해 몇 번 나오긴 했었지만, 오늘처럼 정말로 나오고, 정말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뒤로하는 건 처음입니다.
떠날 때 가져가려고 도구를 몇 가지 챙겨놓았습니다. 잠자리채. 이건 꽤 유용한 아이템입니다. 이걸로 공기식물을 잡으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도 사냥이 수월하거든요.
한 사람을 부양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을 부양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잠자리채부터 챙기게 됐습니다. 심지어 혹시 둘이 아니라 셋……

[어색한 웃음.]

나도 참. 그 사람 의견은 묻지도 않고. 미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가능성이 생기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되네요.

어쨌든 오늘은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는 날입니다. 제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핸드폰에, 정말 기적처럼 수십 년 세월을 지구가 아닌 타행성에서 살아남은 핸드폰에 녹음을 남기는 이유는,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러 떠나는 여정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살던 굴뿐만 아니라, 이 세상으로. 이승으로.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정신을 잃더라도 이 휴대폰은 계속 녹음을 해주겠죠.

녹화까지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카메라 렌즈가 깨졌더군요. 언제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그분들이 제게 ‘해야 한다,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행위들을 하면서도 그저 몸만 움직일 뿐이지 오래도록 마음은 전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정찰을 해야 한다.
손자전거를 돌려서 핸드폰을 충전시켜 놓아야 한다.
글을 잊지 않기 위해 자주 쓰고, 자주 읽어 보아야 한다.

그런 것들 말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쓴 글을 자기가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사람 미칩니다. 마치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쓴 걸 자기가 수없이 다시 보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없으나, 제게는 책이 없었고, 고향에서 몇 광년을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낯선 행성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남겼던 글을 읽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먹인다.]

아무래도 굴에서 하는 녹음은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이 벅찬 떨림을 잠시 집중해서 만끽하고 싶습니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예전에 말려 놓은 공기식물 말랭이를 좀 먹은 다음 나가야겠습니다.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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