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믿음

5 – 믿음

목차

챕터 1로 점프하기

검은-구름-행성의-꿈-5-믿음
검은 구름 행성의 꿈-5-믿음: A4 크기, 80g 종이


6
16
2143

편지를 받았을까. 받을 수나 있었을까. 답장을 보내올까. 오늘이 내가 제안한 날짜인데. 혹시 우리 둘이 서로 너무 가까이에 있다가 누군가가 눈치채는 바람에 잘 될 일도 엉망이 될까 봐, 오늘 편지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일단 좋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모든 것은 비밀이어야 한다. 나와 그녀의 사이에 관한 건 전부.
너무 추상적인 편지를 보낸 것 같아 걱정이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생각할수록 우리는 운명이다.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한다. 직접 만나서 교류하고 나면 나를 모르는 그녀도 똑같이 생각하리라.
그녀. 그녀일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 보니, 삔이란 건 여자들이 쓰지 않는가, 보통? 게다가 빨간 삔. 아닌가?
아니. 아닐 리가 없지. 없어야 한다.
두근거린다. 어쩔 수가 없다. 집착이라 해도 좋고, 착각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흑백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한 세상에서 내가 진짜 여자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미친 것 같다. 나는 평생 혼자 살다 죽을 줄 알았다. 목숨을 끊지만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다 가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서 목숨을 끊는 편이 오히려 존엄을 지키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생각할 게 생기다니. 그것도 여자.
만약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놈들이 대단히 주의 깊었더라면 벌써 옛날에 내 흔적을 찾았을 것이고, 난 붙잡혔을 거다. 그러면 지금 같은 기회도 없었겠지. 하지만 놈들의 조사망은 은근히 느슨하다. 조사망 같은 게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은 것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는지도. 나는 단순히 일련의 우연으로 인해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제한된 삶을 살게 됐는지도.
아무튼, 만약 그 여자가 내 편지를 받았는데도 겁에 질려서 내 말을 무시한 거라면, 이 행성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그 여자를 찾아서 내 말을 일단 들어보게라도 하게끔 만들겠다.
우리는 반드시 서로 합심해야 한다고 설득하겠다. 만약 누가 그녀에게 나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면, 그렇다면 그건 다 세뇌라고, 놈들이 우리를 속박하려는 거라고 가르쳐 주겠다.
그래, 나는 이렇게 운 좋게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을 수도 있다.
내가 지금껏 노력해 보존해 온 모든 것, 그녀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겠다. 지금껏 아껴온 모든 것들을 그녀에게 쓰겠다. 카메라며 녹음기. 다시는 쓸 필요 없다고 여겼던 것들에 담겨 있는 지혜를 전해주겠다.
그리고 말해주겠다.
어쩌면 우리는 함께 살 운명이라고.
아니, 확실히 그럴 운명이라고.
왜냐하면 우리 둘이 만나지 않는다면, 만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으니까.

나도 참. 인류의 미래라니. 내가 인류인데.
하지만 그렇게 쳐도 똑같네.
이런 가능성의 맛을 알아버린 내게, 그 여자한테 거절당하고도 미래가 있을까?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로, 저자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