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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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름-행성의-꿈-4-신_앞
검은 구름 행성의 꿈-4-신_앞: A3 크기, 120g 종이

2143년 6월 15일
날씨: 빨간 달의 마지막 날, 맑음.

<신>

열렬히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 본 적 있는가.
노예일지도 몰라서.
죄수일지도 몰라서.
애완동물일지도 몰라서.

그러니 바로 그 가능성 때문에
노예나 다름없고
죄수나 다름없고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어서.

오래도록 모든 것이 주어지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당신은 선택하기를 택하겠는가, 눈길을 돌리겠는가?
아, 하지만 눈길을 돌리는 것조차 선택인 것을.

시나리오 1.

신은 있다.
계시고, 실제로 행하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 빨간 삔이 돌아오다니.

그래. 주인이 내게 주었던 빨간 똑딱삔.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그 삔.

그게 상상도 못 했던 소식과 함께 내 손에 다시 들려 있다.
‘적’이 있다고 했다.
나와 이어지고 싶다고 했다.
나의 생사가 걱정된다고 했다.

주인은 모른다, 내가 이런 편지를 받은 걸.

신께서 행하셨다.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셨다.
신께서 보내신 게 틀림없다.
선택하신 방식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그저 내가 알아들으라고 이런 형식으로 보내신 게 아니겠는가?

혹시나 내가 글을 모를까 봐,
혹시나 말이 길어지면 내가 참을성이 없어질까 봐,
그래서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그림과 함께
내게 사랑이 넘쳐나는 시를 보내주신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주인은 모르게 하는 방법 중, 내가 잠시 우리를 벗어났을 때 접촉을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또 어딨겠는가? 적어도 우리 밖은 주인이 지켜보지 않을 확률이라도 있지, 우리 안은 (대체 내가 우리 안에 있을 때 밖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형태를 띠기나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지켜봄당할 게 너무나 자명하니까.

나는 종교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딴 거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죽기 며칠 전에는 마치 끝을 예감이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기도만 했다. 모든 걸 포기한 척하기 싫을 때 할 수 있는 게 기도였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믿었던 건 그중에서도 참 이상한 집단이었어서, 어린 내게 별의별 한자까지 가르쳤었다. 부적도 나타났었다.
나는 ‘숭배’를 한자로 쓰는 법을 안다.
‘종말’을 쓰는 법도 안다.
‘시체’도 쓸 줄 안다.
그런 단어를 한자로 쓰는 방법은 이 우리에서 소설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게 아니다.
어린 나는 숭배나 종말이나 시체가 특별히 좋다 나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집단이 미쳤다고 여겼었는데, 이럴 수가, 엄마와 아빠가 맞았구나! 그 집단이 맞았구나! 아니, 그보다는, 틀리지는 않았었구나! 이렇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신이 행하기도 하시니, 그들이라고 틀렸으리란 법은 없지!

왜냐하면, 나와 같은 사람이 이 편지를 보낸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나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왜 이제서야 접촉을 했겠는가?

신이다.
이건 신이 했다.

신이 아니라면, 지금껏 다른 인간이 근처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나는 완전히 머저리 등신이 되니까. 그럴 리가 없다. 나에게 그런 좌절감을 주려는 건 아닐 거야.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려던 나를 엿 먹이는 신은 없을 거야.

믿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그중에서도 저 말이 가장 크게, 명확하게 맴돈다.

믿습니다!

나약한가?
미친 것 같은가?

아니. 수십 년간 우리에 갇혀 그 평온함에 만족하며 살다가, 드디어 바깥이라 할 만한 바깥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면 당신도 똑같으리라. 뭔가 내가 몰랐던, 알 수 없었던, 감히 희망하지도 못했던 존재가 있는 거라고.
그러지 않고는 억울해서……
그보다는 무서워서……

시나리오 2.

만약 신이 아니라면?
아니, 당연히 신이 아니겠지.
신이 있다면, 인간을 예뻐하는 신일 리가 없는 것을!!!

그런데도 내가 신이 있다는 시나리오를 고려하는 이유는 이거다.
내게 편지를 보낸 자가 그냥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나 같은 존재인데, 그 주제에 날 ‘유일한 희망’이라고 부른 거라면? 나는 이 꼴인데, 내가 희망이라고 진심으로 말한 거라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미친놈은 나를 어떤 난처한 상황에 빠뜨린 것인가? 내게 주인이 있다는 건 알고 이러는 건가? 모른다면 왜 이렇게 용감하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무식해서?

검은-구름-행성의-꿈-4-신_뒤
검은 구름 행성의 꿈-4-신_뒤: A3 크기, 120g 종이

이런 종류의 배반, 그러니까 내가 도망을 친다면, 그런다면 내가 노예가 아니더라도 사살당할 수 있다. 죄수가 아니더라도 총살당할 수 있다. 애완동물이라면 잡아먹을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까, 식용이 가장 끔찍할 것 같다.
주인이 나를 잡아먹는다면……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나는 주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빨간 삔 하나만 남기고 간 당신이
내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신은 아니다.
그런데도, 고작 나 같은 인간이 이 미친 짓을 벌였을 리가.
만약 벌였다면……

사람을 만난 지 너무 오래돼서,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나와 같은 사람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예전에 아빠 엄마와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현대 문명과 접촉해 본 적 없는 어떤 부족의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 그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한다. 평면으로 번역된 입체적 물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만 보던 나는, 평면만 보다가 입체적 얼굴을 보게 될 테니, 나는 그럼
어떨까
어떨까
어떨까

그런데 주인이 안다면?
주인이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도망칠 수 없을 텐데.

시나리오 3???

신이 있든 없든 선택.
결국 또 선택인가 보다.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건가 보다.
나는 왜 태어나서
왜 우리에 갇혀서
도망칠지 도망치지 않을지조차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신이 있든 없든 알 게 뭐람?
결국 결과가 같지 않은가!
내 할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뭐 하나 해주는 게 없는 게 신이라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신이 없다고 믿는 게 낫겠네!

그렇지만 또 누군가 그랬지.
신이 있다고 믿는 건 밑져야 본전이라고.
신이 있으면 신을 믿었다고 신 놈이 좋아라 할 테니 이기는 게임이고, 신이 없다면 뭐, 어차피 상관없으니, 잃을 게 뭐가 있냐고.

근데 아니.
난 잃을 게 많아.
신이 있다고 믿고서, 갑자기 나타난 편지가 무슨 계시라고 생각하고서 우리를 벗어났다가, 만약 아니라면?
그저 대책 없는 인간이 날 불러낸 거라면?
나는 구원을 바라는 건데 인간이 나한테 그걸 줄 리가 없잖아!

어쩌면 내가 스케치북에 쓰는 일기를 주인이 전부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잘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나를 어깨 너머로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라.

오늘 산책 때 나는, 구름이 걷혀 평소만큼 주위가 검지는 않으나 평소와 같은 회색 하늘에 둘러싸여 부유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동동 꽃들 사이로 언제나와 같지 않은 빨간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게 삔이었다. 그것과 함께 편지도 있었다. 좀 더 빨리 그리로 산책을 갔더라면. 아니면 바람이 좀 덜 불어서 삔이 그제 산책한 곳에 있었더라면. 혹은 바람이 좀 더 세게 불어서 삔이 다른 날, 다른 허공에 있었더라면……

하지만 ‘더라면’은 소용없다. 벌어진 일만이 벌어졌다.
그것만이 확실해.
그건 신도 주인도 가져가지 못하지.

선택을 해야 한다.
내일까지 답장을 해야 하는데.

차라리 선택할 일이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신의 구원을 받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내게는 신이 없다.
그렇다면.

© 2022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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