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소망

2 – 소망

목차

챕터 1로 점프하기

검은-구름-행성의-꿈-2-소망_앞
검은 구름 행성의 꿈-2-소망_앞: A4 크기, 80g 종이


5
7
2143

종이가 부족하니 날짜를 기록하는 용도로만 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오늘 정찰 때 너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서 이것만은 기록해야 한다. 삔을 발견했다. 그래. 삔. 내가 아무리 지구 기억이 없어도 이런 걸 사람들이 썼었단 건 기억한다. 똑딱삔.

똑딱삔.

읽기 어려운 단어이니 다시 한번 크게, 분명하게 써둔다.
검은 구름과 은색 눈 사이에서 아주 잘 보이는 빨간색이고, 지금 이걸 오른손으로 쓰고 있는 내 왼손에 들려 있다. 길이와 두께는 왼손 엄지손가락 정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글 쓰는 법을 배워두기를 정말 잘했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날짜를 써 두길 정말 잘했다.
하늘을 헤엄치는 법을 연습해 둔 게 오늘 처음으로 보람찼다.
잘했다 잘했어 잘했어 류야 정말 잘했어 류야.
편지를 보내겠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내 계획을. 지금껏 일기라고는 어렸을 때 종이 낭비를 한 게 다지만, 이것은 일기이자 편지다. 혹시 내가 죽게 되더라도, 이 증거만은 남도록.
나는 이 삔을 돌려줄 생각이다. 그와 동시에, 편지도 남길 작정이다.
빨간색 삔이니까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이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종이를 쓰는 것은 인류 최대의 투자가 될지도 모른다! 삔과 함께 내가 그것을 발견했던 공기식물 줄기에 고정시켜 놓는다면, 혹시라도 그 근처를 지나가다 그 사람이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시 공기식물이 그 지역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갈지 멀리 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안 된다는 얘기다.
그 사람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하더라도, 혹시나 내 편지를 인간이 쓴 것만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러니까, 어지럽게 나열된 선과 동그라미들이 인간의 메시지를 형성한다는 것만 알아도, 희망이 있다.
그래도 간단하게 써야지. ‘가나다’는 몰라도 숫자는 알지도 모르니 날짜도 써야겠다. 숫자들의 모임이 날짜란 건 몰라도 숫자 자체를 알 수는 있다, 이 말이다!
최대한 단순하게. 게다가 어차피 그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우리 행성을 가져간, 내 부모님이 중력이 없다시피 한 이름 모를 타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핵에 가까운 굴에서 시궁쥐처럼 죽게 한, 그 악마 같은 놈들이 혹시나 우리의 언어를 알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게 바로 침략자들의 전략 아닌가? 노예가 될 자들에게서 글을 앗아가지만, 자기네는 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서사를 통제하기 위해 식민지의 언어를 익힌다.
빌어먹을 씹새끼들.
아직 내 이름도 밝히지 않는 편이 좋겠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엔 종이가 아까워 그러지 못하지만, 그 사람에게 보낼 편지에는 여백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얼마든지 그 사람을 위해 종이를 쓰겠다.

검은-구름-행성의-꿈-2-소망_뒤
검은 구름 행성의 꿈-2-소망_뒤: A4 크기, 80g 종이

시간을 많이 주어야겠다. 이곳의 달은 우리 기준으로 두 달마다 색을 바꾼다. 마지막으로 색이 바뀌었던 건 4월 16일. 6월 16일에는 빨강달에서 초록달로 바뀐다. (이 자체가 너무나 길조가 아닌가! 마치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는 것처럼! 옛날 옛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에 신호등이란 게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 걸로 사람들의 오가는 흐름을 조절하지 않으면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 다시 올까?)
오늘은 5월 7일. 달이 새로운 색을 띨 때까지 한 달 넘게 시간을 준다면, 그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무슨 수를 쓰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여기 산 사람이라면 날짜를 몰라도 달의 주기를 알 테니 확실하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다. 그림을 못 그리지만, 우리 선조들은 지혜롭게 동굴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겠는가. 사인펜 남아 있는 게 어디 있을 거다. 색깔 사인펜은 진작에 말라버렸지만, 검은 게 어디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상표의 사인펜은 꽤 오래간다. 위대한 인류의 발명품, 사인펜.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사인펜.
인간의 수명은 80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몇 년을 살게 될까. 핵 가까이에 오지 않고서야 중력이 약해서 하늘을 헤엄치듯 유영할 수 있는 이곳. 인간이 숨 쉴 공기는 있으나 먹을 것은 공기식물밖에 없는 척박한 이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살까. 나는 벌써 20년을 훌쩍 넘게 살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60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혹시 공기식물이 가장 기막히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 40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똑딱삔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여기 근처에 존재한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글도, 내가 삔과 함께 남길 편지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단 뜻이다.
그러니 누구든 이걸 발견하게 된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라.
인류는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인류라고 이름 짓지 않았는가.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로, 저자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