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창

1 –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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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구름-행성의-꿈-1-창_앞
검은 구름 행성의 꿈-1-창_앞: A3 크기, 120g 종이

2143년 5월 6일
날씨: 검은 구름에 은빛 눈.

<창>

가장 중요한 건 인내심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 두 가지를 지키기만 하면 창은 나를 저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창이 열리면 그리로 따뜻한 음식이 들어오고, 보드라운 이불이 들어오고, 어떤 때는 하늘하늘한 예쁜 옷도 들어온다. 나는 그것들을 냉큼냉큼 받아먹고, 덮고, 입는다.

창으로 손이 들어오면 그저 그리 두면 될 뿐이다.
내 키만 한 여섯 손가락에 검은 비늘이 달린 그 손이 창으로 들어와 나를 움켜쥐고 우리에서 꺼내도, 그저 그리 두면 될 뿐이다.

주인과 나는 산책을 간다.
아니, 그보다는, 주인은 나를 산책하게 둔다.

주인이 자신을 주인이라고 지칭하는지, 혹은 그런 개념이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들’이라고 부를 만한 사회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걸 이해했더라면 그……
아,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자?
그놈?
그 새끼?

나는 주인을 주인 말고 다르게 부르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내가 그런 걸 이해했더라면 그자를 주인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터. 오히려 인간들은 ‘세상’이라고 퉁 쳐서 일컫기도 하던 과거의 어느 작은 행성의 주인처럼 행세했을 터.

인간은 넘쳐났지만,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제각각 주인이었다.
아무렇게나 벨 수 있는 나무의 주인.
고문하다 죽여도 아무도 맞죽이지 않는 길고양이의 주인.
갓 깔아서 고약하고도 어지러운 공장 냄새가 나는 아스팔트 거리의 주인.
따라서 그것들에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도, 시원한 비도 모두 인간의 것.
짜고 포근한 바다 냄새도 모두 인간의 것.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인류의 것.
주인.

한 행성의 주인 종이었던 기억이 내게 전혀 없었더라면 나는 나의 주인을 사랑했을까?

주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대개는 그렇다. 오로지 그놈의 손, 여섯 손가락에 검은 비늘이 달린 손이 창을 통해 들어올 때만 나는 그 새끼를 볼 수 있다.

왜일까.
나를 위해 디자인된 창인가?
아니면 내 우리 자체가 나를 위해 디자인된 건가?
왜?
내가 뭐라고?

인류가 없는 인간은 초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있었더라면 저절로 더 좋았으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우리가 좀 더 우거졌더라면 살기가 편했을 텐데’ 한다든가,
길고양이가 ‘우리가 좀 더 번식했더라면 살기가 편했을 텐데’ 한다든가,
아스팔트가, 햇살이, 비가, 포근한 바다가,
‘“우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 인류에게 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과 같지 않을까.
많아질수록 쉬운 목표물이 될 뿐인 것을.
실제로 그랬던 것을.

지구에서는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가지각색을 띠었었는데.
아무리 어린 나이에 떠나 왔어도 생각나지. 암, 생각나.
눈은 희었지만 그 와중에도 색깔이 있었다. 여기와 달랐다. 여기는 검은 구름과 은빛 눈의 세계. 완전하고도 완벽한 흑백의 세계. 동동 꽃조차 검은 곳. 아니, 그냥 검은 정도가 아니라, 검은 모든 것들은 빛을 빨아들이고, 흰 모든 것들은 빛을 반사하는, 그런 곳.
(동동 꽃은 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다. 지구에는 허공에 떠다니는 꽃 같은 건 없으니까.)

아. 달이 있었지.
이곳 달은 나름 화려하다. 무려 세 개의 다른 색으로 변하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이 비추는 세상이 이렇게나 무채색인데, 무슨 소용이람?

그렇다고 여기와 다른 거기가 더 좋았었던가?
그건 아니다.
꼭 그랬던 건 아니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지만 혼내기도 했었다.
아빠도 나를 안아주었지만 소리 지르기도 했었다.

주인들을 불러서는 안 됐다. 접촉하려 해선 안 됐다.
그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주인들은 우리를 그냥 두었을지도 모른다.

보아라, 손이 나를 데려가는 모습을.
비늘이 덮여 있으나 그것은 막무가내로 미끈거리지는 않는다.

뱀.
동물원의 뱀을 만져 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뱀은 따뜻한 빨간 전구 아래에서 쉬다가 사육사에 의해 어항처럼 생긴 통에서 꺼내진다. 실제로 그런 통을 어항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른다.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다. 책은 많지만, 그런 자잘한 지식은 체계적으로 책에 담기지 않는다. 주인은 내게 주로 소설을 준다. 거기선 만들어진 단어도 있고, 진짜라고들 여기는 듯한 단어들도 있다.
나는 그 차이를 모른다.
주어진 상황에서 움직이는 인물들만 어렴풋이 안다.

그러니 내가 어항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어항이다.
혹시 누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항이 뭔지 알까.
글을 알기는 할까.

글을 알고 나서 주인이 생긴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검은-구름-행성의-꿈-1-창_뒤
검은 구름 행성의 꿈-1-창_뒤: A3 크기, 120g 종이

뱀은 그렇게 꺼내어지고, 사육사는 그 녀석을 ‘어린이 친구들’에게 자랑해 보인다. 나는 한때 그 ‘어린이 친구들’ 중 하나였는데, ‘제법 용감한 친구네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뱀 친구’를 만진 적이 있다.
전구 아래에서 쉬던 뱀은 따뜻했다. 비늘은 미끌거리지 않았다. 엄마랑 같이 슈퍼에서 봤던 굴비 같은 촉감이 아니었다. (만지지 말라는 걸 만져서 혼이 났었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울자, 집에 와서 내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저녁을 준비하며 아빠가 부엌에서 손질하던 고등어의 촉감도 아니었다.
나는 고등어에 비늘이 있다는 것도 안다. 비늘이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건 소설책이 아니라 엄마에게서 배운 마지막 인류의 지식 중 하나였다.

뱀의 비늘은 고급스럽다. 두껍고, 진하다.
내 주인의 비늘은 마치 뱀의 비늘과 같다. 그때 그 동물원의 뱀은 흔한 갈색이었고, 내 주인의 손이 창을 통해 들어올 때면 빛을 전부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색이라는 점만이 좀 다르다.

아, 그리고 손이 크지.
나를 집어 올릴 정도로.

검은 비늘에 둘러싸인 나는 창을 통과하고, 그러고 나면 손은 사라진다.
주인은 나를 산책하게 둔다. 나는 어느새 허공에 떠 있다.

오늘은 검은색 구름 사이를 좀 헤엄쳤고, 그 사이에 은빛 눈이 내렸다. 이는 흰 눈과는 확연히 다르다. 은빛 눈은 그야말로 빛을 낸다. 그저 은색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광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눈이 아플 정도는 아니며, 주인과 비슷하게 내가 ‘발견했다!’ 싶을 때쯤 스르르 사라진다. 실제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나를 우리에서 꺼낸 주인은 매번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간다’와 ‘온다’라는 개념이 들어맞긴 하는 존재인 건가?

아마 우리 안에서는 중력이 존재하고 내가 허공에 뜨지 않기에 주인의 손이 잠시나마 보이게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추측한다.
중력과 보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까지는 모른다. 아마 나는 인류가 주인인 행성에 머물렀더라도 그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크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크지도……

무엇으로 컸다고 해야 하나?
죄수?
노예?

그렇게 부르기엔, 주인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주인은 내게 인간에게 적합한 음식을 준다. 심지어 인간에게 적합한 예쁜 그릇에 담아, 아름다운 식기와 세트로.
내 우리 안에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좋은 향이 나는 나무 식탁과 의자가 있다. 1인용이다. 거기에 나는 흰 도자기 그릇, 놋그릇, 별별 색칠이 된 그릇을 놓고, 옥이며 금으로 만든 숟가락, 젓가락, 포크, 나이프로 식사한다.

또한 주인은 내게 옷도 준다.
이불도 준다.
가끔은 내가 일어나고 나면 머리가 적당한 길이로 잘려 있고, 머리띠를 하고 있기도, 삔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은 나를 산책

산책.
산책.
산책.

아아.
차라리 내가 식용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인간의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다.
어째서 식용인 것이 애완인 것보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나는 언제 먹기 좋은 크기가 되는가. 몸이 다 자란 지는 벌써 한참 되었는데.

산책 시간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 나를 나는 증오한다.

그렇지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 있는 데에 감사하라고 엄마 아빠가 그러지 않았는가. 낳아준 걸 감사하라고 우기지 않았는가.
내가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견딜 수 없었을 테지.

보아라, 인간 부모.
당신들이 만든 나는 살아 있다.

손은 반드시 나를 우리로 돌려보낸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내일까지 인내하고 감사하며 기다리면 그뿐이다.

글에 제목을 지었다. 언젠가부터 갖게 된 습관이다. 어느 날 일어나, 거대한 스케치북을 발견한 뒤에 생긴 습관.
그날 나는 언제나처럼, 새하얀 오리털과 비슷한 촉감이지만 아마 오리털은 아닐 솜 종류로 뒤덮인 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크지는 않기에, 향긋한 나무 식탁이 바로 보였다. 그 위에 낯선 물체가 있었다. 바로 이 검은 스케치북이었다.
그 위에는 검은 볼펜 하나도 있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의 첫 쪽에 날짜가 쓰여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숫자로:

2125.9.12.

적어도 난 날짜였다고 생각했다.
생각한다, 지금도.
그때까지 얼마나 오래도록 우리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얼추 그럴싸한 듯했다. 당시 시계도 다른 기록물도 없어서 시간 감각을 잃어가던 와중에도, 나는 십 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숫자는 아마도 인간의 글자 중 이해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명확했으리라고도 생각한다. 인간 아닌 자가 이해하기에.

그러나 나는 주인의 뜻을 모른다.
왜 나에게 이런 스케치북, 펜, 소설책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내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사람은 시간 개념이 없어지면 바래지기 때문에?

재롱을 부려야 하나.
반항을 해야 하나.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것:
이 글의 주인은 나다.
나는 이 글에 제목을 붙였다.

주인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내 눈에 보이는 순간이 너무 짧듯, 내 귀에 들리는 순간도 너무 짧아서 내가 그 부름을 듣지 못하는 것뿐일까?

여기서 사용되는 내 이름이 궁금하다.

우리 안은 늘 평온하다.

© 2022 한아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장소, 사건은 작가 상상의 산물이거나 허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사람, 기업, 회사, 사건, 혹은 지역과의 유사성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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